1장. 화폐의 역사와 진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꼽으라면 '화폐'를 빼놓을 수 없다. 문자나 바퀴의 발명과 마찬가지로, 화폐는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핵심 동력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돈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그 본질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하지만 암호화폐와 리플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돈이란 무엇이고, 또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돈의 형태와 기능은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통해 계속 변형되고 확장되어왔다.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경험하는 돈이 앞으로도 같은 형태와 기능만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비역사적(ahistorical)이다.
화폐의 본질과 기능
화폐는 단순한 교환의 도구를 넘어서는 사회적 약속이다. 종이 한 장에 어떻게 그토록 큰 가치가 담길 수 있는지, 숫자일 뿐인 계좌 잔고가 왜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폐의 본질부터 이해해야 한다.
교환의 혁명: 물물교환에서 화폐로
인류 최초의 거래 방식은 물물교환이었다. 사냥꾼은 잡은 고기를 농부의 곡식과 바꾸었고, 어부는 잡은 물고기를 도공의 그릇과 교환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바로 '욕구의 이중일치' 문제다.
예를 들어, 쌀을 가진 농부가 고기를 원하고, 고기를 가진 사냥꾼이 그릇을 원하고, 그릇을 가진 도공이 쌀을 원할 때, 이들은 어떻게 거래를 성사시켜야 할까?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동시에 거래를 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발생한다. 거래 상대가 늘어날수록 이런 문제는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진다.
화폐의 등장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공통의 교환 수단이 생김으로써, 복잡했던 거래가 단순화된 것이다. 농부는 쌀을 팔아 화폐를 얻고, 이 화폐로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만큼의 고기와 그릇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
화폐의 세 가지 얼굴
화폐는 크게 세 가지 핵심 기능을 가진다. 첫째, 교환의 매개체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지불 수단으로 기능한다. 특정 화폐가 교환의 매개체라는 사회적 약속에 기반하여 우리는 화폐를 활용해 서로가 원하는 가치를 교환한다.
둘째, 가치의 저장 수단이다. 오늘 번 돈을 내일 혹은 먼 미래에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현재의 구매력을 미래로 이전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이다. 농부는 수확기에 받은 대금을 화폐로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

MicroStrategy의 CEO인 마이클 세일러는 약 45만개의 비트코인을 사들였다. 그는 전 세계 부의 대부분은 교환의 매개가 아닌 가치 저장 수단으로써 존재하는데, 제한된 발행량을 가지며 안전한 디지털 자산인 비트코인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가치 저장수단이라고 설파한다. (출처: Yahoo Finance)
셋째, 가치의 척도다.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사과 한 개가 1000원이고 배 한 개가 2000원이라면, 우리는 배가 사과의 두 배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화폐의 기능은 세 가지에서 영원히 멈추게 될까? 문명이 발전하고 새로운 기술이 발견되면서, 화폐에게 네 번째 얼굴이 생길 가능성은 없을까?
화폐에 대한 신뢰의 본질
화폐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가 필수적이다. 이 신뢰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작동한다. 첫째는 가치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다. 오늘 1만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을 내일도 같은 금액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수용성에 대한 신뢰다. 다른 사람들도 이 화폐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며, 법정화폐의 경우 법률로 강제된다.
셋째는 발행 주체에 대한 신뢰다. 현대의 법정화폐는 중앙은행이라는 단일 기관이 독점적으로 발행한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화폐 가치를 적절히 관리할 것이라는 신뢰가 중요하다.
이러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친 경험과 제도적 장치들이 이 신뢰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신뢰가 한번 무너지면 그 영향은 파괴적이다. 1923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시기에는 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다녀야 할 정도로 화폐 가치가 폭락했다. 당시 사람들은 월급을 받자마자 물건을 사야 했는데, 몇 시간만 지나도 화폐 가치가 반 토막 날 정도였다.
화폐의 진화: 고대에서 근대까지
최초의 화폐들: 실용성에서 출발한 가치
인류의 첫 화폐는 실용적 가치를 지닌 상품이었다. 소금은 대표적인 예다. 라틴어로 급여를 뜻하는 'salary'가 소금(salt)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로마 군인들이 급여의 일부를 소금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소금은 보존성이 뛰어나고 누구나 필요로 하는 필수품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화폐가 될 수 있었다.
조개껍데기도 널리 사용된 화폐였다. 특히 카우리(cowrie) 조개는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제도에서 오랫동안 화폐로 사용되었다. 크기가 일정하고 휴대가 간편했으며, 위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카우리 조개를 화폐로 사용했으며, 이는 후에 중국 화폐의 상형문자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상나라(기원전 17세기~11세기)에서 화폐로 사용되던 카우리 조개의 형태를 본뜬 상형문자는 '조개(貝)'자의 기원이다.
금속화폐의 시대: 가치의 표준화
금속화폐의 등장은 화폐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기원전 600년경 리디아 왕국에서 최초로 주조 화폐가 등장했다. 금과 은의 합금으로 만든 이 동전은 왕의 문장이 새겨져 있어 공식적인 가치를 보장받았다. 더구나 금속은 부패하지 않고, 분할과 운반이 용이하며, 가치가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금속화폐가 '표준화된 가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상품화폐는 품질이나 상태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었지만, 표준화된 금속화폐는 동일한 가치를 보장했다. 결과적으로 화폐에 대한 신뢰성과 수용성이 높아져 거래 상대방 간의 추가적인 품질 확인이나 협상 과정이 최소화되어 거래 비용이 크게 낮아졌다.
주화의 발전과 가치 보장의 문제
금속화폐의 보편화는 새로운 문제도 낳았다. 화폐 위조와 훼손의 문제였다. 순도가 낮은 금속을 섞거나, 주화의 가장자리를 깎아내는 등의 방법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주화의 가장자리에 톱니 모양을 새기는 등 다양한 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또한 통치자들은 종종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화폐 가치를 조작했다. 로마 제국의 경우, 1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데나리우스 화폐의 은 함유량이 95%에서 5%까지 떨어졌다. 이는 세계 최초의 인플레이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은행권의 등장: 신용화폐의 시작
금속화폐의 한계를 극복한 것은 은행권의 등장이었다. 이는 13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시작되었다. 상인들이 금을 은행에 맡기고 받은 예탁증서가 화폐처럼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증서는 은행에 맡긴 금에 대한 청구권으로 쓰였다.
초기의 은행권은 100% 금 준비율을 유지했다. 즉, 발행된 모든 예탁증서는 동일한 가치의 금이나 은으로 언제든 교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행가들은 곧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예탁자들이 동시에 금을 찾으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부분지급준비제도가 발전했고, 이는 근대 은행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다.

조반니 드 메디치(좌)는 중세 유럽 최대의 금융 제국을 세웠고, 당시 혁신적이었던 복식부기와 환어음 시스템을 도입했다. 메디치 가문은 금융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르네상스를 후원하였다. (출처: Uffizi Galleries)
메디치 은행은 이러한 혁신을 주도한 대표적인 예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 한 지점에서 발행한 신용장을 다른 지점에서 현금화할 수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 국제 금융 시스템의 원형이 되었다.
근현대 금융질서의 형성
신용화폐의 발전과 중앙은행의 등장
신용화폐는 금융의 혁명적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도 만들어냈다. 은행이 지나치게 많은 신용화폐를 발행하거나, 예금자들이 일시에 예금을 인출하려 할 경우 시스템 전체가 붕괴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필요했다.
1694년 설립된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은 최초의 현대적 중앙은행이다. 당시 윌리엄 3세의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설립되었지만, 점차 '은행의 은행'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영국은행은 정부로부터 독점적인 화폐 발행권을 부여받았고, 다른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을 관리했다.
금본위제의 시대: 국제 금융 질서의 확립
19세기에 들어서며 금본위제가 세계적인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금본위제 하에서 각국의 화폐는 일정한 양의 금과 교환될 수 있었다. 이는 국제 무역과 금융 거래에 안정성을 제공했다. 런던은 이 시스템의 중심지였고, 영국 파운드화는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금본위제의 장점은 명확했다. 환율이 금을 기준으로 고정되어 있어 국제 거래의 불확실성이 줄었다. 또한 각국이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의 시기는 '제1차 세계화'로 불릴 만큼 국제 무역과 자본 이동이 활발했다.
금본위제의 종말과 브레턴우즈 체제
하지만 금본위제는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큰 위기를 맞았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각국은 금과의 교환성을 중단했고, 지폐를 대량 발행했다. 전후 금본위제 복귀를 시도했지만,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며 결국 완전히 붕괴했다. 영국은 1931년, 미국은 1933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연합국들은 뉴햄프셔 주의 브레턴우즈에 모여 새로운 국제 통화 체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브레턴우즈 체제다. 이 체제에서 미국 달러화는 1온스당 35달러로 금과의 교환성을 보장받았고, 다른 나라들의 통화는 달러화에 고정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글로벌 통화체제를 구축했고, 이후 세계 경제는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자유무역체제로 운영되게 되었다. (출처: Federal Reserve History)
현대의 법정화폐 시대: 달러 패권의 확립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달러화의 금 태환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닉슨 쇼크'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재정 적자가 발생하자, 미국은 화폐를 대량 발행했고, 이를 지켜보던 프랑스가 금 태환을 요구했다. 다른 나라들 역시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은 금 태환을 중단하며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로써 세계는 완전한 법정화폐(fiat currency)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 이상 화폐 가치를 뒷받침하는 실물 자산(금)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정부와 중앙은행의 신용만이 화폐의 가치를 지탱하게 된 것이다.

닉슨의 금 태환 정지 선언 이후 달러 가치가 흔들리자, 미국은 사우디와 페트로달러 협정을 맺었다 사우디는 원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고, 미국은 사우디 안보를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2024년 협정이 만료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미국 외교 전문가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출처: Library of Congress)
하지만 흥미롭게도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특히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합의로 시작된 '석유달러' 체제는 달러 패권의 새로운 기반이 되었다. 전 세계 석유 거래가 달러화로 이루어지면서, 모든 국가가 달러화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화폐 시스템의 한계와 도전
현대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
2008년 9월 15일, 158년 역사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미국 4위 투자은행의 몰락은 전 세계 금융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주가는 폭락했고, 금융기관들은 서로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수십조 달러의 자산 가치가 증발했다.

미국 월가의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 흐름과 달러 기축통화체제에 균열을 내고 신냉전 구도 형성에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출처: Guardians)
더 충격적인 것은 위기의 전염 속도였다. 미국의 주택 담보 대출 부실 문제가 순식간에 전 세계 금융시스템을 마비시켰다.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그리스 등 여러 국가가 채무불이행 위기에 직면했다. 실물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 세계 경제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를 겪었다.
이 사태는 현대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특히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금융기관들이 너무 거대해져서 파산하면 경제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어쩔 수 없이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문제는 금융위기 이후에도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대형 금융기관들은 더 커졌다. 2008년 당시 '대마불사' 논란의 중심에 있던 JP모건체이스의 자산은 2배 이상 증가하여 2025년 현재 4조 달러에 육박한다. 시스템적 중요 금융기관(SIFI)으로 지정된 거대 은행들의 위험 부담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금융시장의 상호연결성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파생상품 시장은 2008년 위기 이후에도 꾸준히 성장해 2023년 기준 명목 거래 규모가 700조 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전 세계 GDP의 7배가 넘는 규모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에서는 한 기관의 문제가 순식간에 전체 시스템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
통화정책의 한계와 딜레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들은 전례 없는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기준금리를 사실상 0%까지 낮추었고,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자산매입을 시작했다. 미 연준의 총자산은 2008년 8,700억 달러에서 2022년 9조 달러까지 증가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BOJ)도 비슷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비전통적 통화정책들은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자산 가격의 거품이다.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은 실물경제의 성장과 무관하게 급등했다. S&P 500 지수는 2009년 3월 저점 대비 2021년 말까지 6배 이상 상승했다.
이는 부의 불평등도 심화시켰다. 자산을 보유한 계층은 자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계층은 오히려 실질 구매력이 떨어졌다. 미국의 경우 상위 1%가 보유한 금융자산의 비중이 2008년 23%에서 2021년 32%로 증가했다.
또 다른 문제는 '좀비기업'의 증가다. 초저금리 환경에서 수익성이 낮은 기업들도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본래라면 퇴출되었어야 할 기업들이 연명하게 되었다. OECD 국가들의 좀비기업 비중은 2008년 4%에서 2020년 15%까지 증가했다.
금융 포용성의 실패
현대 금융시스템의 가장 큰 허점 중 하나는 금융 포용성의 문제다. 세계은행의 금융포용성 지표(FINDEX)에 따르면, 아직도 전 세계 성인의 24%에 해당하는 14억 명이 기본적인 은행 서비스조차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다. 금융 서비스에서의 소외는 빈곤의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대륙별 개인 계좌 보유 인구 비율. 제3세계를 중심으로 한 금융포용성 문제는 현대 금융시스템이 아직 풀지 못한 문제로, 블록체인 등 새로운 기술과 시스템을 통한 해결이 필요하다. (출처: World Bank)
은행 계좌가 없다는 것은 돈을 보관할 곳이 없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대출을 받을 수 없고, 보험에 가입할 수 없으며, 송금도 어렵다. 급여를 받더라도 현금으로 받아야 하고, 해외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려면 높은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사업을 시작하거나 자녀 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국제 금융의 비효율성
2025년 현재,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돈을 보내는 데 여전히 3-5일이 걸린다. 1970년대에 구축된 스위프트(SWIFT, 국제은행간통신협회) 시스템이 아직도 국제 금융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메일로 실시간 통신이 가능한 시대에 여전히 팩스를 사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비용도 큰 문제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0달러를 해외송금할 때 평균 수수료가 12달러(6%)에 달한다. 아프리카나 태평양 도서국으로 송금할 경우 수수료율이 10%를 넘는 경우도 많다. 전 세계 해외송금 시장의 규모가 연간 7,000억 달러임을 감안하면, 수수료로만 매년 400억 달러 이상이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화폐
현금 없는 사회로의 진입
현금이 사라지고 있다. 2023년 기준 스웨덴의 현금 거래 비중은 2% 미만이다. 한국도 비슷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현금 대신 카드와 모바일 결제가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 결제 시스템이 마비되면 경제 전체가 멈출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2021년 스웨덴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쿱(Coop)은 전자결제 시스템 장애로 인해 전국 800여 개 매장이 최대 5일간 영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 사건은 디지털 결제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현금 없는 사회의 리스크를 부각시켰다.
중앙은행의 디지털 혁신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각국 중앙은행들은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2024년 9월 기준으로, 전 세계 134개국 이상이 CBDC를 연구하고 있으며, 그 중 44개국은 개발의 고도 단계에 있다. 특히 중국, 바하마, 나이지리아 등 일부 국가는 이미 CBDC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CBDC는 법정화폐의 디지털 버전이다.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고 보증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다. 또한 프로그래밍이 가능해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정부 보조금을 특정 용도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거나, 유효기간을 설정할 수 있다.

중국의 CBDC인 디지털 위안화의 실제 결제 모습.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디지털 기축통화로 키우겠다는 전략 하에 24년 홍콩에서 처음으로 본토 밖에서도 디지털 위안화를 도입했다. (출처: JD.com)
하지만 CBDC에도 한계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프라이버시다. 모든 거래가 중앙은행에 기록되기 때문에, 정부가 시민들의 경제활동을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가 '감시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
이처럼 현대 금융시스템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 중앙화된 통제, 높은 비용, 느린 처리 속도, 금융 소외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과 메커니즘에 기반한 새로운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혁신이 요구된다.
첫째, 탈중앙화된 신뢰 시스템이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보여준 것처럼, 중앙화된 기관들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위험하다. 중앙은행이나 거대 금융기관의 실패에 대비한 새로운 형태의 신뢰 메커니즘이 필요한 시점이다.
둘째, 국경을 초월한 효율적 송금과 결제가 가능해야 한다.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여전히 국가 간 장벽이 높은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세계 어디서나 몇 초 안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치를 이전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프로그래밍 가능한 화폐가 필요하다. 단순한 가치 이전을 넘어, 특정 조건과 규칙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스마트 머니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경제 활동의 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넷째, 진정한 의미의 금융 포용성이 실현되어야 한다. 전 세계 14억 명의 금융 소외 계층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기반이 바로 블록체인이다. 다음 장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며, 왜 이것이 금융의 미래가 될 수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