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리플과 SEC 소송: 역풍을 이겨내다
2020년 12월 22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리플과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리플이 발행한 XRP가 미등록 증권이라는 것이 SEC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암호화폐 시장은 큰 충격에 빠졌다. 리플의 가격은 급락했고, 미국의 주요 거래소들은 앞다투어 XRP의 거래를 중단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소송이 리플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세계 최대 금융 시장인 미국에서 사실상 퇴출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플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SEC의 소송 제기 직후 XRP의 거래를 중단한 주요 거래소들. 2020년 12월 SEC의 소송제기로 리플은 적어도 미국 내에선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여겨졌다.
SEC 소송의 배경과 주요 이슈
이 소송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SEC가 리플을 겨냥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금융 혁신과 기존 규제 체계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전 SEC 의장 제이 클레이턴(좌)과 게리 갠슬러(우). 클레이턴은 퇴임 하루 전 리플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를 후임인 갠슬러가 이어받았다. (출처: WSJ)
SEC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XRP가 본질적으로 증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둘째, 이를 미등록 상태로 판매했다는 것, 셋째, 리플의 임원진들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러한 규제가 투자자 보호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SEC는 리플의 경영진이 개인적으로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들의 개인적 책임을 추궁하고자 했다.
SEC의 주장은 '하위 테스트(Howey Test)'라는 증권 판단 기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1946년 미국 대법원이 확립한 이 기준은 어떤 투자 상품이 증권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왔다. 하위 테스트에 따르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 해당 상품은 증권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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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의 투자가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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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사업에 대한 투자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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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가 타인의 노력에 의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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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에 대한 합리적 기대가 있을 것
SEC는 리플랩스가 XRP를 판매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기대하게 했고, 이 수익은 리플랩스라는 회사의 노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XRP는 증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리플의 반론은 체계적이고 강력했다. 리플은 XRP가 증권이 아닌 '디지털 자산'이라고 반박했으며, 그 주장은 다음의 세 가지 핵심 논거를 바탕으로 했다.
첫째, XRP는 리플랩스라는 회사가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리플랩스가 사라지더라도 XRP 레저는 계속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마치 이메일 프로토콜이 특정 회사에 종속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설명했다.
둘째, XRP의 주된 용도는 투자가 아닌 국제 송금과 결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전 세계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XRP를 송금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셋째, SEC가 지난 8년 동안 XRP를 증권으로 보지 않다가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은 '공정 고지(Fair Notice)'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부가 규제를 할 때 시장 참여자들에게 충분한 사전 고지를 해야 한다는 법적 원칙이다.

리플랩스의 최고법률책임자(CLO) 스튜어트 알데로티. 그는 암호화폐 역사상가장 큰 소송을 부분적 승리로 이끌며 리플을 구해냈다. (출처: DailyCoin)
소송의 진행 과정과 전환점
첫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2년 6개월간의 SEC와의 법적 공방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소송이 시작되자 많은 미국 거래소들이 XRP 거래를 중단했고, 리플의 미국 내 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리플은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첫 번째 중요한 전환점은 2021년 말에 찾아왔다. 리플 측이 SEC 내부 문서 공개를 요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2018년 힌만 전 SEC 국장의 이더리움 관련 연설에 대한 문서였다. 이 연설에서 힌만 국장은 이더리움이 증권이 아니라고 언급했는데, 이 판단의 근거와 과정이 XRP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가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이후 2022년 한해 동안 전문가 증언과 내부 문서 검토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여러 중간 판결들을 통해 리플에 유리한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리플이 보여준 가장 큰 강점은 '실질적 활용 사례'였다. 리플은 전 세계 수백 개의 금융기관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었고, XRP는 실제로 국제 송금에 활발히 사용되고 있었다. 이는 XRP가 단순한 투자 상품이 아니라 실질적인 유틸리티를 가진 디지털 자산이라는 리플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리플은 소송으로 인해 미국 내 사업이 어려워지자 글로벌 시장에서 꾸준하게 사업을 확장했고, 이런 노력들은 소송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판결이 리플과 암호화폐 시장에 미친 영향
그리고 2023년 7월 13일,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는 리플 소송에 대한 첫 판결을 내리게 된다. 판결의 핵심은 "XRP 자체는 증권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다만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판매의 경우에는 증권법 위반이 인정되었지만, 일반 거래소에서의 거래는 증권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판결은 리플뿐만 아니라 암호화폐 산업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는데,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첫째, 디지털 자산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법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토레스 판사는 판결문에서 디지털 자산이 언제 증권으로 간주되고, 언제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이는 다른 암호화폐 프로젝트들에게도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둘째, 디지털 자산의 성격이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즉, 처음에는 증권의 성격을 가졌더라도, 충분히 분산화되고 실질적인 사용 사례가 생기면 그 성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암호화폐 프로젝트들에게 하나의 발전 모델을 제시했다.
셋째, 미국 법원이 혁신적인 기술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토레스 판사는 판결문에서 블록체인 기술의 특성과 가능성을 상세히 분석했고, 이는 앞으로 업계 내 다른 기술 혁신 사례들에 적용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판결이 나온 직후, 암호화폐 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XRP의 가격은 급등했고, 미국의 주요 거래소들은 XRP 재상장 검토에 착수했다. 코인베이스는 판결이 나온 당일 XRP 거래를 재개했고, 다른 주요 거래소들도 잇따라 재상장을 진행했다.
판결 이후 리플은 더욱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특히 미국 내에서의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SEC 소송으로 인한 규제 리스크 때문에 리플과의 협력을 꺼리던 많은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이제는 협력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반 거래소 거래에 대해서는 증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결 내용이 기관들의 투자 검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4년 7월 토레스 판사는 SEC가 리플에 요구한 20억 달러의 벌금도 1.25억 달러로 감면했다. 사실상 리플의 완승이라는 평가다. (출처: New York Post)
더 넓게 보면, 이 판결은 암호화폐 산업이 제도권 금융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법원이 디지털 자산의 특성을 이해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점은, 앞으로 더 많은 금융 혁신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SEC와의 소송은 리플에게 큰 시련이었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리플은 단순한 기술 기업을 넘어,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금융 혁신을 이끄는 선도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리플이 소송 과정에서 보여준 위기 대응 전략이었다.
첫째, 리플은 법적 대응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시장에서의 어려움을 글로벌 시장 확장의 기회로 전환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아시아, 중동, 남미 등에서 꾸준히 파트너십을 확대해 나갔고, 이는 결과적으로 리플의 글로벌 경쟁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둘째, 리플은 기술 개발과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SEC 소송이 리플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리플은 이 기간 동안 더 많은 기술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특히 국제 송금 시장에서의 실질적인 성과들은 리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제 리플은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SEC 소송에서의 첫 판결은 리플이라는 하나의 기업의 법적 승리를 넘어, 암호화폐 산업 전체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특히 2025년은 암호화폐를 둘러싼 글로벌 금융 환경의 큰 변화가 예상되는 해다. 2024년에 있었던 비트코인·이더리움 ETF 승인과 트럼프의 재선에 이어 2025년에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성장, 리플 ETF 승인, 각국 중앙은행들의 CBDC 도입, 스위프트 2.0 체제의 시작 등 여러 중요한 변수들이 리플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리플이 어떤 기회와 도전을 맞이하게 될지, 그리고 이것이 국제 금융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3부: 리플의 미래> 파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특히 트럼프의 재선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치 환경이 리플과 암호화폐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리플이 이를 어떻게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