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달러 4.0
미국은 축복받은 나라다. 땅도 넓고 인구도 많고 자원도 많다. 미국 전역에 있는 세계 최고의 대학들에는 매년 전 세계최고의 인재들이 모이고, 이는 더 많은 지식과 기술, 그리고 부를 창출해낸다. 그러나 미국이 가진 여러 가지 강점 중에서도 미국을 미국이게 만드는 가장 큰 무기는 미국의 통화인 달러가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라는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최고의 수출품은 자동차도, 무기도, AI도 아니다. 미국의 가장 큰 무기이자 수출품은 아무리 찍어내도 수요가 있는 달러다.
기축통화의 숙명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있다. 기축통화국이 된다는 것은 자국의 통화 정책으로도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일인 동시에 그에 따른 상당한 책임도 수반한다. 기축통화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축통화국이 가지는 딜레마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기축통화의 정의
기축통화에 대한 정의는 경제학자마다 관점이 다르다. 그러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기축통화(world currency)는 한마디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통화라는 뜻이다. 기축통화는 국제무역과 금융 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로 사용된다.

17세기 외국환 은행으로서 전 세계 금융의 중심 역할을 한 암스테르담 은행은 네덜란드의 길더화를 기축통화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출처: WGA)
역사적으로 기축통화는 변해왔다. 근현대 금융질서가 형성된 이후만 하더라도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길더화가 기축 통화로 기능했으나, 1784년에 있었던 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기축통화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 영국의 파운드화가 기축통화가 되었으며, 세계 2차 대전 전후까지 기축통화로 역할했다.
앞서 1장 <화폐의 역사와 진화>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의 달러는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을 통해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달러는 국제 무역, 금융 거래, 투자, 외환 보유의 주요 통화로 사용되며, 석유와 같은 원자재 거래도 대부분 달러로 결제된다. 달러는 전 세계 무역 결제 통화의 약 44%를 차지하며, 전 세계 중앙은행 외환보유고의 60%가 달러다.
기축통화의 조건
기축통화의 조건은 경제학자마다 그 해석과 중요도가 다르지만,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충분한 유동성, 가치 안정성, 신뢰성, 대안 통화의 부재가 그것이다.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기축통화는 세계 각국이 무역, 금융 거래, 외환 보유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 이는 세계 경제의 모든 거래 수요를 충족시킬 정도의 통화량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국제 무역과 금융 거래에서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외환시장에서는 환전의 매개 수단으로 기능해야 하며, 각국은 자국 통화 가치를 담보하기 위한 외환보유고로도 이를 보유해야 한다. 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그 대신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를 자국 화폐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하는 것은 기축통화국의 책무이자 기축통화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과거 은화가 세계적인 공용 통화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도 스페인이 포토시 은광 개발을 통해 엄청난 양의 은화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통량이 없었다면 은화는 특정 국가 내 혹은 역내 화폐로밖에 기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기축통화는 가치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기축통화의 주요 기능인 외환보유 대상으로써의 통화를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의 달러 외환 보유액은 2024년 기준 4,156억 달러다. 미국 달러의 가치가 쉽게 변동한다면 외환보유 목적으로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세계 여러 국가들이 하루 아침에 수십 조, 수백 조의 국부를 잃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해당 통화는 세계 경제에서 더 이상 각국의 외환 보유 대상 통화로 선택받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기축통화국은 압도적인 금 보유량으로 기축통화의 가치를 담보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의 전쟁 부채 상환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금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금본위제를 실시하며 달러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기축통화는 신뢰성을 가져야 한다. 기축통화의 신뢰성은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기축통화국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요소에서 비롯된다. 군사력과 외교적 영향력에서의 압도적 우위, 첨단 금융시장 및 금융 시스템의 보유, 그리고 높은 국가 신용도다.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해당 통화와 발행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형성한다.
넷째, 기축통화는 반드시 대안 통화의 실질적인 부재를 필요로 한다. 기존 기축통화국보다 더 신뢰를 갖게 되는 경쟁 국가가 등장하면 기축통화는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패권 다툼, 전쟁 등을 통해 세계 질서가 바뀌게 된다. 반면에 기축통화국이 가진 군사, 정치, 금융 패권에 도전할 만한 국가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기축통화국은 그 지위를 연장할 수 있다.

레이 달리오에 따르면 패권국의 흥망성쇠는 사이클을 따라 반복되며, 근대금융질서가 수립된 17세기 이후 기축통화국의 운명도 같은 패턴을 밟아왔다. (출처: economicprinciples.org)
기축통화의 딜레마
기축통화국이 되는 것은 막대한 특권이지만, 동시에 큰 부담도 따른다. 이는 '트리핀 딜레마'라고도 불리는데, 기축통화의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서 기축통화국은 부채가 늘고 무역적자를 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을 말한다.
미국이 기축통화국이었던 지난 80년간 세계 경제가 성장하면서 더 많은 달러 유동성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미국은 계속해서 무역적자를 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적자가 계속되면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고, 이는 기축통화로서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다. 반대로 무역적자를 줄이려고 하면 세계 경제에 충분한 달러를 공급할 수 없게 되어 세계 경제가 위축되고 세계 각국은 대안 통화를 찾게 된다.
미국의 난제
트럼프는 지난 1월 20일 美 의회 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미국의 황금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국의 문제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아니, 사실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위급하다. 현재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를 풀면 다른 하나가 엉키게 되는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사안들의 조합이다.
난제 1: 기축통화 유지 x 무역 적자 해결
미국 대통령의 1차 임무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유지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아니게 된다면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패권국이라고 할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은 그 어떤 과제보다도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 지속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증가하는 세계 무역, 금융 거래의 중심 통화로써 이전과 같이 문제없이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 세계 경제에 유동성을 계속해서 제공하기 위해서는 무역 적자를 감수하고 부채를 발행해야 한다.
하지만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이유도 결국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다. 게다가 미국 우선주의를 천명한 트럼프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트럼프는 미국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낙후된 북동부 러스트벨트의 지지를 업고 승리했기 때문에 제조업의 리쇼어링(reshoring)과 관세를 통한 제조업의 부흥, 그리고 무역 적자 해결도 강력하게 추진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럴 경우 무역 흑자를 목표로 하게 되는데, 그러면 달러가 밖으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유입되게 된다. 이때 세계 경제에 통화를 유통해야 하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트리핀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트리핀 딜레마의 해결을 위해 모든 금융, 경제,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여 달러의 적정한 가치를 유지해야 한다. 달러는 어느 정도 강세여야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 강세이면 미국산 제품의 가격이 올라 제조업 경쟁력이 하락한다. 그러면 무역적자가 심화되고 트럼프가 이루고자 한 제조업의 부흥은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러가 약해지면 기축통화의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 트럼프 2.0은 달러의 적정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묘책을 고안해내야만 한다.

1990년대 미국은 제조업을 희생하고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제조업과 달러, 두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고 있다. (출처: MIT Press)
난제 2: 부채 축소 x 자금 조달
미국은 현재 부채 축소와 자금 조달이라는 또 하나의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정부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국가 부채를 관리하고 축소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행하고자 하는 공약과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통화정책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재정정책과 긴밀히 연계된 복잡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부채 상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25년 초 총 36조 달러를 넘어섰으며, 2020년 이후에만 약 12조 달러의 연방 부채가 누적되었다. 이러한 적자 지출은 GDP 대비 비율로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준에 근접해 있으며, 시장에서는 미국의 지속적인 적자 재정 운영에 대해 높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부채는 2025년 1월 기준 36조 달러(한화 약 5경원)를 넘어서며 약 10년마다 2배씩 빚이 늘어나고 있다. (출처: 美 재무부)
특히 한 국가의 경제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양을 측정하는 지표인 M2 통화량 증가 추이를 보면, 코로나 이후 엄청난 유동성이 공급되었고, 이는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치 하락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변화하는 세계 질서(Changing World Order) '의 저자인 레이 달리오는 미국에서 너무 많은 '부채의 화폐화(debt monetization)'가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채의 화폐화란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직접 매입하는 정책을 의미하며, 이는 단기적으로는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과 통화의 신뢰성 저하를 초래한다. 현재 달러는 이미 충분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재정정책 측면에서도 국채 발행이 지속될 경우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가치는 더욱 악화될 수 있다.
미국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은 지난 2023년 실리콘 밸리 은행(Silicon Valley Bank, SVB)의 파산 사태를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코로나 시기에 풀린 유동성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급등하면서 연준이 급격하게 금리를 올렸고 이에 따라 국채 가격이 하락했다. 이는 지방은행들이 보유한 국채의 가치도 하락시켰고 SVB의 파산을 초래했다. 이처럼 미국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누적되면 어느 순간 달러에 대한 의심이 폭증하는 순간도 충분히 올 수 있다.

위기가 감지되자 SVB 고객들은 하루만에 약 56조원의 돈을 인출했다. 결국 바이든 정부는 SVB 고객의 예치금을 전액 보증하기로 했다. (출처: Reuters)
일각에서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부채를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 어떤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부채를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주체는 없다. 어쩔 수 없는 방만함이라고 할지라도, 방만함의 끝에는 파국이 있을 뿐이다. 미국도 부채가 통제되지 않으면 결국 경제 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정권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계속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야만 한다. 부채를 줄이고 관리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부채를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전 정부들은 국가의 장기적 재정건전성을 희생하면서 단기적 목표를 위해 빚을 내서 필요한데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 미국,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더 이상 단기와 장기적 국가의 이해관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트럼프 2기는 단기적 경제 성장 및 개혁을 위해 부채를 관리하는 동시에 반드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여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고 불리는 美 재무부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해왔다. 하지만 중국이 미국 국채 보유액을 지속적으로 줄여나감에 따라 미국은 국채에 대한 수요처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트럼프에게는 부채를 줄일 수 있으면서도 국채는 계속 발행할 수 있는 묘수 중에 묘수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의 묘책: 달러 4.0
1944년,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가 된 이후, 미국은 여러 차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재정 적자,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 경제의 혼란, 일본과 독일의 경제적 부상, 2008년 금융위기 등 매번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위협하는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미국은 그때마다 새로운 묘책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오히려 달러의 지위를 더욱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금본위제에서 페트로달러로, 다시 금융 패권으로 진화하면서 달러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왔다.
백악관에 돌아온 트럼프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36조 달러에 달하는 국가 부채, 무역적자, 중국의 부상과 탈달러화 움직임 등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문제들이 달러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한 트럼프의 해법은 '달러 4.0' 체제인 것으로 보인다.
달러 1.0, 브레턴우즈 체제와 금본위제: 신뢰성의 구축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반면, 미국은 전쟁 특수를 누리며 엄청난 양의 금을 축적했다. 1944년 당시 미국은 전 세계 금 보유량의 75%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약 20,000톤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러한 압도적인 금 보유량은 달러화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브레턴우즈 체제 하에서 미국은 금 1온스당 35달러의 고정 환율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다른 국가들의 통화는 달러화에 고정되었고, 각국 중앙은행은 보유한 달러를 언제든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달러-금 태환' 약속은 달러화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다주었다. 전 세계는 달러를 '금처럼 안전한' 자산으로 인식했고, 이는 달러가 명실상부한 기축통화로 자리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1944년부터 1971년까지 브레턴우즈 체제 하에서 달러화의 가치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으며, 이 시기는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린다.
달러 2.0, 페트로달러 체제: 달러의 강력한 희소성 구축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 비용이 급증하면서 달러 체제의 첫 번째 큰 위기가 찾아왔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은 과도하게 달러를 발행했고, 이는 달러의 가치를 위협했다. 특히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가 보유한 달러를 모두 금으로 교환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국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할 조짐을 보이자,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하는 '닉슨 쇼크'를 단행했다.
그러나 미국은 곧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냈다. 1974년 키신저 국무장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역사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사우디는 석유 거래를 전적으로 달러화로만 결제하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OPEC의 다른 회원국들도 이 체제에 동참했고, 이는 '페트로달러 체제'의 시작이 되었다. 이제 석유를 사고 팔기 위해서는 반드시 달러가 필요했고, 이는 달러에 대한 전 세계적인 수요를 창출했다. 금 대신 석유라는 새로운 가치 기반을 확보한 달러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력한 기축통화가 되었다.
달러 3.0, 플라자와 역플라자: 트리핀 딜레마의 우회
1980년대에 들어서며 미국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막대한 무역적자, 특히 일본과 독일에 대한 심각한 무역 불균형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는 기축통화국이 직면하는 필연적인 딜레마였다. 세계 경제가 성장하려면 더 많은 달러가 공급되어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미국의 무역적자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였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 문제를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1985년 9월,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 회의에서 일본과 독일의 통화 가치를 대폭 절상시키는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엔화의 가치는 2배 이상 올랐고, 독일 마르크화도 크게 절상되었다. 이는 달러 가치의 전반적인 약세 없이도 특정 국가들과의 무역 불균형만을 해소할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정책도 한계에 부딪혔다. 일본과 독일의 경쟁력이 여전히 강했기 때문이다. 이에 1995년, 미국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는 '역플라자 합의'를 추진했다. 더 이상 제조업에서 경쟁하지 않고, 대신 금융 산업을 육성하기로 한 것이다. 달러 강세를 용인하면서 전 세계의 자본을 월스트리트로 끌어들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여기서 축적된 자본은 실리콘밸리의 성장을 뒷받침하며 미국 IT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트럼프는 1988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해 미국은 타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해결해야하며, 아무도 해결하지 못할 때는 자기가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에 대해 하나 확실한 건, 그는 트리핀 딜레마를 우회할 생각이 없다. (출처: OWN)
달러 4.0: 스테이블코인과 비트코인 전략 비축
이제 트럼프는 지난 80년간 축적된 달러의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혁신적인 묘책을 준비하고 있다. '달러 4.0'으로 불리는 이 전략은 스테이블코인과 비트코인 비축이라는 두 개의 축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단순한 정책 변화가 아닌,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달러 패권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첫 번째 축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새로운 달러 유동성 공급이다. 트럼프는 CBDC 도입을 반대하는 대신,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육성하려 한다. 이는 여러 가지 전략적 의미를 가진다.
우선, 스테이블코인은 새로운 국채 수요처가 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발행한 코인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 국채를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한다. 중국이 미국 국채 보유를 줄여나가는 상황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2024년 기준 주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보유한 미국 국채는 1,0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시장이 성장할수록 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스테이블코인은 기축통화 달러의 새로운 유통 경로가 될 수 있다. 커져가는 암호화폐 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의 발행량과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이는 기축통화로서 새로운 유동성을 공급하는 수단이 된다. 특히 무역 흑자를 추구하면서도 세계 경제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해야 하는 트리핀 딜레마의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축은 비트코인 전략 비축을 통한 부채 문제 해결이다. 신디아 루미스 상원의원이 발의하고 트럼프가 실행은 준비 중인 '비트코인 전략적 비축' 정책의 핵심 목표는 36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국가 부채 해결이다.
비트코인을 비축해서 한 국가의 부채를 갚는 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레이 달리오는 그의 저서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이러한 행태가 역사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설명한다.
"지나치게 많은 불태환 화폐를 찍어내면 채권자산의 매각과 앞서 설명한 '뱅크런'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돈과 신용의 가치는 하락하고 해당 통화와 부채를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타려고 한다... 대폭발(대규모의 채무불이행이나 큰 폭의 통화가치 하락)은 50년에서 75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한다."
"이렇듯 부채를 축적했다가 일시에 상각 처리하는 관행은 수천 년간 지속되었으며 아예 제도로 만들기도 했다. 구약성서에는 50년에 한 번씩 부채를 탕감해주는 희년(Years of Jubilee)에 관한 구절이 있다. 부채 사이클이 50년에 한 번씩 찾아오므로 사람들은 이에 맞추어 합당한 준비를 하고 행동했다."
자산 관리 회사 VanEck의 분석에 따르면, 신시아 루미스 상원 의원이 제안한 법안대로 미국이 100만 비트코인을 준비금으로 조성할 경우 향후 24년 동안 국가 부채를 35% 줄일 수 있다. 이는 비트코인의 연평균 성장률(CAGR)을 25%로 가정했을 때, 2049년까지 비트코인 가격이 4,230만 달러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에 기반한다. 같은 기간 미국의 국가 부채는 연평균 5%씩 증가하여 119조 3천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비트코인 준비금으로 이중 약 42조 달러를 상쇄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VanEck의 전망은 비트코인이 향후 25년 동안 423배 상승하여 전 세계 금융자산의 약 18% 차지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런 공격적인 가정도 전체 빚의 35%밖에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출처: VanEck)
달러 4.0 전략은 역사적으로 미국이 달러 위기에 대응해온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로 시작된 달러 1.0이 금본위제를 통해 달러의 신뢰성을 구축했다면, 1971년 닉슨 쇼크 이후의 달러 2.0은 석유 달러 체제를 통해 달러의 필수불가결성을 확립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시작된 달러 3.0은 글로벌 금융 패권을 통해 달러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제 트럼프는 스테이블코인과 비트코인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 달러 체제의 4번째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달러 패권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미국이 직면한 부채 문제와 트리핀 딜레마에 대한 혁신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리플과 달러 4.0
하지만 기축통화국으로서 현재 미국이 직면한 난제들은 너무 복합적이고 역설적이어서, 스테이블코인과 비트코인 비축의 조합보다 더 복합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할 수 있다. 과거 달러 1.0에서 달러 2.0으로, 그리고 달러 2.0에서 달러 3.0으로 넘어갈 때는 핵심이 되는 1, 2개의 문제만 해결하거나 우회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개의 복합적인 문제를 한번에 풀어야만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한계
스테이블코인의 등장과 성장은 분명 미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시해주었다. 암호화폐 산업의 성장과 함께 스테이블코인은 미국의 새로운 국채 수요처가 되어 주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성장이 전망된다. 또한 다른 형태로 기축통화인 달러를 세계 무역시장에 공급하는 역할도 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이 가진 명확한 한계는 스테이블코인도 성장하고 쓰임새가 많아질수록 미국 재무부의 채권 발행량도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부채 약 36조 달러 중 28조 달러인 거의 80%가 채권이다. 채권의 지속적인 발행 증가는 현재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부채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 비축의 한계
비트코인을 전략적으로 비축해서 미국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자는 접근도 실제로 실현된다면 미국의 패권을 수십년 연장할 수 있는 전략이다. VanEck의 분석처럼 향후 24년간 국가 부채의 35%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시나리오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현재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무너질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제가 부채다. 이런 상황에서 단 하나의 새로운 자산에 미국의 운명을 걸 수 있을까? 미국으로서는 비축 전략의 안정성을 위해 단일 자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산으로 분산 투자하는 헤지 전략이 비축 시스템의 체계적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또한 소수 의견이기는 하지만 비트코인은 미국 입장에서 100% 신뢰할 수 있는 자산은 아니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중국이 배후에 있을 수 있다는 의심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 중요한 리스크가 될 수 있다.
리플의 활용도
이러한 상황에서 리플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리플은 두 가지 측면에서 미국의 전략에 기여할 수 있다.
첫째, 다중 가상자산 비축의 관점이다. 리플의 갈링하우스 CEO는 지난 1월 29일 본인의 X(전 트위터) 라이브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리플을 포함한 다양한 가상자산을 미국의 전략적 자산으로 도입하는 것에 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미 지난 1월 23일 행정명령을 통해 신설한 실무 그룹에게 180일 이내에 국가 차원에서 디지털 자산을 비축하는 방안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트럼프 행정부가 비트코인만이 아닌 리플을 비롯한 다수의 가상자산을 비축하기로 이미 결정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명분을 쌓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리플의 CEO 브래드 갈링하우스와 CLO 스튜어트 알데로티는 지난 1월 7일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저녁 만찬을 가졌다. (출처: X)
둘째, 복수 기축 통화 체제에서의 역할이다. 현재 달러는 국제 무역 결제, 가치 저장 수단, 외환보유 자산 등 너무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부채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도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과거 역사 사례를 기반으로 복수 기축 통화 체제의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리플은 특히 달러의 역할을 전략적으로 분담할 수 있다. 리플이 국제 송금과 결제 부문에서 달러의 역할 일부를 대체한다면, 달러는 더욱 효율적으로 기축 통화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리플은 CBDC 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이 직접 CBDC를 발행하지 않더라도, 리플을 통해 다른 국가들의 CBDC와 연결되는 브릿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이 CBDC 시대에도 국제 금융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리플은 미국의 관리 하에 있는 자산이다. 중국이 주도권을 가진 것으로 의심받는 비트코인과 달리, 리플은 미국 기업이 개발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이점이다.
새로운 도약의 가능성
다중 자산 비축과 복수 기축 체제라는 전략은 미국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단일 자산에 의존하는 것보다 다양한 디지털 자산을 활용하는 것이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도 더 효과적이며, 복수의 기축 통화 시스템은 현재 달러가 감당하고 있는 과도한 부담을 분산시킬 수 있다.
리플이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그리고 얼마나 폭넓게 채택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이 기축 통화국으로서 직면한 문제들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리플의 채택은 분명 가능한 시나리오일 수 있다. 제도권의 비트코인 채택도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적절한 기술이 적절한 때에 등장하여 세계의 가치 저장수단으로 부상했듯이, 리플의 준비된 기술이 적절한 때에 미국과 세계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세계는 이제 새로운 금융 질서의 형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리플이 그 변화의 중심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리플이 어떻게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진입하고, ETF라는 새로운 투자 수단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